오늘은 지난번 왕산 허위 선생님 글(링크)에 이어서 추가로 ㅣ기억해야 할 이인영 선생님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인영선생님(1868-1909)은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현상과 어머니 한 씨는 그를 4남매 중 맏이로 키웠으며,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뛰어나 유학자로 많은 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의병 활동의 시작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시행하자 이인영은 의암 유인석, 운강 이강년 등과 함께 일본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여주에서 의병 500여 명을 규합하여 춘천과 양구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1896년 여름, 의병 해산령이 내려지자 그는 경북 문경으로 은둔했습니다.
다시 의병장으로 나서다
을사늑약 체결과 대한제국군 해산 이후, 해산된 군인들까지 의병에 합세하며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은찬, 이구채 등이 이인영을 의병 지휘자로 모시기 위해 간곡히 권유했고, 결국 그는 1907년 7월 25일 이를 허락하여 원주로 가서 의병 원수부를 설치하고 관동창의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제를 인류의 적으로 규정하고 조국의 국권을 되찾자고 호소하며 격문을 보냈습니다.
13도 창의군 총대장으로 서울 진공을 시도
이인영은 전국의 산발적인 의병들을 통합하여 서울로 진격해 일본군을 패퇴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1907년 11월, 전국의 의병대장들에게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13도 창의대진소원수부’를 설치하여 총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열악한 무기와 병력 부족으로 인해 일본군에 패배하고 망우리고개를 넘지 못한 채 후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친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통곡하며 자책했으며, 허위 군사장에게 군무를 위탁하고 총대장직을 사임했습니다.
체포와 순국
부친상을 치른 후에도 이인영은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1909년 6월 7일 충북 황간 금계동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의연하게 대처했습니다. 1909년 8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9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유산과 기념
정부는 1962년 이인영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했습니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역사 속에서 빛나며, 그의 희생과 헌신은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허위 선생님과 더불어서 꼭 잊지 말아야 하는 우리의 선조임을 기억하고, 그의 결기와 실행력을 본받고자 합니다.
"빼앗긴 건 되찾아 올 수 있지만, 내어줄 건 되돌릴 수 없소"(미스터 션샤인 대사 중)
<정남c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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